날조의 공간
[송강/조각] 판타지X고전물 본문
새카만 흑단을 펼쳐놓은 듯이 검게 물든 하늘 위로 붉은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피를 잔뜩 머금은 듯이 불길하게 빛을 내뿜던 달은 알고 있었을까. 붉은 달 뒤로 빼꼼히 숨어 그저 지켜보던 별은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항상 내 뒤에서 나를 바라만 보시던 나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그 누가 알고 있었을까, 그 날 밤 내가 그 문을 열게 되리라는 사실을.
*
내 어머니는 다른 양갓집 규수들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았다. 그리 엄격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리 살갑지도 않으셨다. 7살 때, 우연히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내게 애착을 가지시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그 어린 나이의 나는 생각했다. 원치 않은 혼인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께는 사랑하는 이가 있었으며, 비록 관직이 높은 자는 아니었으나 성실하고 평이 좋기로 자자했던 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아버지는,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께서는 그런 자보다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자를 어머니의 신랑으로 원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관직을 더욱 높이기 위해 어머니를 이 집안으로 팔아넘기듯 시집을 보내었다고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이 집에 원치않은 시집을 오시고는 나를 낳아 기르셨다.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주의도 주지 않으시고, 야단도 치지 않으셨으며, 예절에 대해서도 가르치시지 않았다. 나는 그저 눈치껏 배웠을 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호기심이 많았다. 하루종일 궁궐같이 커다란 집을 돌아다니느라 배를 곯은 적도 많았으며, 길을 잃어 순이어멈에게 꾸중을 들은 날도 있었다. 집 가운데에는 커다란 사당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는데 나는 항상 그 안이 궁금했다. 허나, 그 곳만큼은 가지말아달라며 나를 만류하던 순이어멈의 뜻에 따라 그 곳만큼은 내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8살, 붉은 달이 떠오르던 어느 날 밤 이전까지는.
붉은 달이 너무나 신기했다. 흔히 뜨는 모습도 아니거니와, 그 새빨간 빛깔이라니. 어머니의 치맛자락만큼이나 선명하고 붉은색에 취해 어린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방 안을 빠져나왔다. 달에 홀려 정처없이 걸음을 걷던 내가 도착한 곳은 사당이었다. 굳게 자물쇠로 잠긴 문이었지만 나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저 자물쇠는 내가 손을 대면 쉽게 열릴 것이라는 이상하리만큼 굳은 믿음이. 내 믿음대로 슬며시 손을 대자 자물쇠를 저 혼자 걸쇠를 풀어내더니 제 기능을 잃고야 말았다. 문고리에 걸린 자물쇠를 빼내고 문을 열기만 하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던 손으로 겨우 자물쇠를 빼어내고는 사당의 문을 열었다. 사당 안은 간소했다. 고작 있는 것이라고는 공간의 구석에 놓여있는 긴 촛대와 은은하게 타오르는 기이한 푸른 촛불, 그리고 묘한 문양이 아름답게 세공된 조그마한 상자 뿐이었다. 어린 나는 그 것이 매우 시시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리고 이왕 들어온 김에 상자나 열어보자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왜 순이어멈이 나를 말렸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한밤중에 사라진 정실의 첫째 아들, 승윤 덕에 가문이 발칵 뒤집어졌다. 승윤을 돌보던 순이어멈 뿐 아니라 모든 시종들, 승윤의 조부모, 심지어 승윤에 대해 크게 관심없던 승윤의 부친마저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며 승윤의 안위를 걱정했다. 오직, 승윤의 모친만이 별다른 반응없이 시종이 내어온 따스한 차를 무덤덤하게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노발대발한 승윤의 부친이 그 모습에 언성을 높이자, 승윤의 모친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 아이라면 아마 사당에 있을 겁니다, 대감."
승윤의 부친이 당황해 문 밖으로 뛰쳐나가자 승윤의 모친은 요사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찻잔을 들었다.
모친의 말대로 승윤은 정말 사당에 쓰러져 있었다. 탐스럽던 검은 머리칼이 하얗게 새어버린 승윤의 모습에 부친은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하필이면,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통탄한 일이로다. 승윤의 부친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내 쓰러진 승윤을 손수 안아든 부친은 승윤을 그대로 방으로 데리고 가 눕힌 뒤에 시종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승윤의 모친은 [내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이제서야 마음 편히 눈을 감습니다.] 라는 유서를 남긴 채 그렇게 목을 매었다.
잠에서 깬 승윤은 하얗게 새어버린 자신의 머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어찌 된 일이냐. 당황해하고 있을 때쯤 들이닥친 비보에 승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 묻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진정 내가 이리 되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인가. 사당에 대해 귀뜸한 것도, 사당에 대한 궁금증을 부풀린 것도 생각해보면 말수 적던 제 어미였다. 이리 되기만을 제 어미는 기다리고 있었다. 말수 적던 제 어미가 사당에 대해 물을 때만큼은 그리 살갑게 굴었었다. 그제서야 승윤은 깨달았다, 사랑받지 못했다 라는 기분을.
*
그 이후로 승윤은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또한 승윤을 찾는 이도 없었다. 암묵적으로 승윤은이미 버려진 아이 취급을 받았다. 정실의 장손이라는 명목으로 그나마 집에 존재했지만 이미 어미가 죽을 때 같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승윤의 가문은 승윤의 존재를 지워나갔다. 승윤의 부친은 그런 승윤을 한 번씩 만나러 왔었다. 그저 와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승윤을 바라보다 한 식경 쯤 지나면 자리를 털고 방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승윤의 부친이 시종들을 시켜 승윤을 단장시켰다. 어깨를 넘어버린 새하얀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다듬지 않아 마구잡이로 길어진 손톱도 잘라내고 새 비단으로 곱게 짜낸 옷을 입히고는 가마에 승윤을 태웠다.
"아버님,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입니까."
"세자저하께서 너를 보고파 하신다."
"하지만, 저는 이미 죽은 몸 아닙니까. 게다가…, 이 모습을 하고 저하를 뵈었다가는."
"저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아마 저하께서 너에게 '계약'을 요구하실 터인데 아무 것도 묻지 말고 하겠다고 하거라. 네가 퇴궐을 하고나오면 오늘 밤 너에게 모두 말을 해줄 터이니."
"알겠사옵니다."
평소와 달리 초조해하는 낯설은 부친의 모습에 승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자저하와 승윤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나라의 황실에서는 하나의 아들만을 잉태할 수 있었고, 그 아들 외에 다른 형제지간이나 자매지간은 생기지 않았다. 황실의 족보에서조차 후계를 이을 자손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며 그 하나 이외의 자손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또래가 없었고 세자는 크디큰 궐에 혼자 뿐이었는데, 우연히 아버지를 따라 입궐했던 날 마주친 세자와 승윤은 친구가 되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신분의 차이가 컸고 저를 편하게 대하라는 세자의 말을 어길 정도로 승윤은 대범하지 못했지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몇 번 궁을 왕래하며 세자와 승윤은 어느 정도는 친하게 지내었다. 서신도 주고 받을 정도였으니 말을 다했으리라.
허나, 그 날 밤 이후 승윤은 변해버린 제 모습에 스스로 겁을 먹고 숨기 급급했고 가문조차 승윤을 죽은 이 취급을 했으니 세자 또한 그리 알고 있었을 터인데 어찌 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또한 '계약' 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아버지가 밤에 해줄 말이란 또 무엇인가. 승윤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제 손을 꼬옥 부여잡고는 미안하구나 라는 말만 연신 반복하는 제 아비 때문에.
간만에 온 궁은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했다. 세자가 머무는 궁은 원래 가마로 출입할 수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승윤은 부친의 손을 잡고 궐 안을 갈 때 였다. 말없이 서 있던 부친이 승윤에게 말을 건네왔다.
"이 나라의 건국신화가 어찌 되는지 알고 있느냐."
"세 개의 달이 차오르고, 세 개의 태양이 차올라 추위와 더위로 죽어가는 백성을 태왕께서 은빛 늑대의 도움을 받아 2개의 달과 태양을 삼켜버리고 세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은빛 늑대가 2개의 달과 태양을 삼킨 뒤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은빛 늑대는 태양과 달의 정기를 흡수에 인간이 되어 태왕의 곁을 보필했느니라. 이 이야기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지. 허나, 태양과 달의 정기는 차마 한낱 미물인 늑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늑대는 더위와 추위에 죽어가고 있었단다."
"……."
"태왕은 그 늑대를 살리기 원했고 신은 그 방법을 점지해 주셨다. 태왕과 약조를 하여 태왕의 운명이 다할 때까지 태왕을 보필하고 지켜내면 몸 속에서 날뛰는 태양과 달의 기운을 가라앉혀 주기로 말이다. 그리고 태왕이 죽음을 맞이하는 날, 인간으로 변한 은빛 늑대의 입에서는 구슬이 튀어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태양과 달의 기운의 결정체였다."
승윤의 몸 위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은빛 늑대와 황제. 그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토록 말수가 적던 아버지가 어이하여 갑자기 이렇게 말을 쏟아내는 것일까. 아버지와 맞잡은 손에 승윤은 힘을 주었다.
"그 이야기를 왜 갑자기 하시는 겁니까."
"승윤아, 네가 연 그 상자는 태양과 달의 기운이고 그리고 네 머리가 이렇게 새어버린 이유는 네가 태양과 달의 기운은 흡수했기 때문이란다. 세자와 계약하지 않으면, 너는 17살이 되는 해에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다 미쳐 죽을 것이야."
"……!"
"그 구슬은 강력한 힘과 지혜를 주지만, 그 대신 자유를 앗아가지. 그래서 우리 가문에서는 그 사당을 봉인해둔 것이란다. 우리 가문의 피가 섞여있다면 태양과 달의 기운을 저도 모르게 흡수해 버리니까. 보통은 서자에게 기운을 흡수시켜 황제께 보내지만 말이다. 나는 네가 솔직히 선택하길 바라는구나. 17세가 되는 해에 죽을 것인지, 아니면 자유를 빼앗긴 채 왕의 말이 되어 손에 피를 묻히며 살아갈 지."
"아버지, 저는 살고 싶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유가 없다고 해도 말이냐."
"그렇다고 해도 살고 싶습니다. 제가 만약 거부한다면 저희 가문은 파멸되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자유를 빼앗긴 채 태왕에게 휘둘리던 선조님에 대한 기록을 읽었기 때문이란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바라지도 않았던 아이였으니 이렇게라도 아버지께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부친의 손을 승윤이 잡아 끌었다. 황제의 개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연명하고 싶었다. 제 어미의 뜻대로 되기는 싫었다. 황제가 될 세자가 얼마나 저를 구속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명을 달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내 다다른 세자의 방 앞에서 승윤의 부친은 승윤을 꼭 껴안았다. 굳세게 살거라, 승윤아. 우리 가문의 상징은 대나무, 그 곧고 높은 긍지를 부디 지키거라. 이내 뒤돌아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승윤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 드넓던 그 등이 아니라 축 가라앉은 어깨에 승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허나, 이내 열리는 문소리에 승윤은 고개를 앞으로 두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세자로 가득 찼다.
세자는 뛰어난 미남자였다. 뚜렷한 이목구비하며, 총명한 지혜며, 뛰어난 무위실력이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위 관직에 있는 이들의 여식들이 모두 흠모할 정도로 황제로써, 또한 남자로써 뛰어난 사람이었다. 제 앞에 있는 세자는 못 본 사이에 더욱 빼어난 외모를 갖추었다. 좀 더 남성다워진 이목구비에, 황제로써 갖추어야할 위엄까지 지니고 있어 세자의 박력에 승윤은 흠칫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그 모습에 세자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승윤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세자에게 다가갔다.
"오…, 오랜만에 인사드리옵니다, 저하."
"더 다가오거라. 왜 그렇게 멀리 있누. 그 사이에 내가 싫어진 것이냐."
웃으며 농을 치는 세자의 모습에 승윤은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일어서서 다가가야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자의 농에 당황해 빨리 가야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승윤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오자 세자는 안면 가득히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머리가 하얗게 되었구나. 은빛 늑대일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서자가 올 줄 알았지만 네가 올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나는 참으로 천운을 타고 났어."
반짝이는 눈빛이 음험했지만 승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개를 조아린 채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태양과 달의 정기를 흡수하고 나니 민호의 등 뒤에 무엇인가가 아른거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림자와 같은 것은 태초의 계약이고 자신이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 승윤이 정말 늑대였다면 귀를 접고 꼬리를 말고는 납작하게 엎드렸을 것이었다, 복종의 의미로써.
"'계약'을 하자꾸나, 승윤아."
그러더니 물이 든 그릇과 조각칼을 꺼내어 승윤에게 내밀었다. 승윤이 조각칼을 쥐고 엄지손가락을 긋자 피가 뚝뚝 쏟아졌다. 이내, 세자 또한 칼로 엄지손가락을 그었고 그릇 위로 피롤 쏟아냈다. 그러고는 자신이 한 모금 마시더니, 승윤에게 그 그릇을 내밀었다. 덜덜 떨며 승윤이 그릇을 받고는 멍하니 붉게 물든 그릇을 응시했다. 마치 그 날 밤, 붉은 달처럼 보였다. 은근히 재촉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세자의 모습에 승윤은 눈을 감고 그릇 안에 있던 내용물을 모두 삼켰다. 이로써 '계약' 이 끝났다는 게 몸소 느껴졌다. 자신을 억압하는 듯한 기운도 사라졌고, 또한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도 본래 검정색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음습한 기운을 품은 세자, 민호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승윤은 깨달았다.
본인에게 이제 자유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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