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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의 공간

이 이야기는 가장 흔한 이야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진부한 이야기. ㅡ누군가가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그리는, 그런 이야기. * 언제였을까, 그가 마음 속에 불쑥 솟아났던 게. 아니다. 정정하겠다. 불쑥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천천히 스며들었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내가 발 디딜 틈조차도 없이 그렇게 가득 차 있었다. 정해져 있는 시간에, 정해진 옷을 입고, 앉아 수업을 듣는 게 그렇게만 지루하게 느껴지던 2학년 3반의 강승윤의 돌아가는 쳇바퀴 같던 단조로운 일상에, "강승윤." 그가 나타났다. 사실 어쩌면 불쑥이라고 해도 맞지 않을까. 읽던 책의 갈라진 틈에 책갈피를 끼워넣듯이 나의 세계로 그는 파고들었다. 어느 봄날의 쉬는 시간, 지금 떠올려도 여전히 따사롭고 ..

때가 이른 봄바람이 교정을 휘돌았다. 봄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흘러온 따뜻한 기운은 겨우내 잠들어 있던 꽃눈을 북돋웠고 여기 W고 졸업식에 드물게도 눈 대신 꽃눈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벚꽃잎이 이제는 다 자란 청년의 어깨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벌써 졸업이구나, 왠지 모를 감상에 눈가가 시큰해져 승윤은 눈을 꾹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 울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던 1학년, 그래도 대학은 가겠다며 야간자율학습 때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꾹꾹 참아내며 공부했던 2학년, 겨우 잡은 뚜렷한 목표를 위해 이 악물고 버텼던 3학년.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추억은 붙잡을 새 없이 흘러 벌써 오늘에 도달했다. “졸업 축하해, 반장.” 교실에 들어서니 들리는 목소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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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세 "아바아, 빠빠." 단 둘이 함께 지내고 있던 그때였다면 고요했을 주말의 아침. 느지막이 단잠에 빠져 배가 고파야만 머리 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잠이 깼음에도 안 깬 척,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나른했던 일상. 불과 몇 년 만에 고요했던 주말의 아침은 어느새 늦잠이라고는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또 다른 평일이 되었다. "… 우리 딸, 일어났어요?" "우웅, 빠빠." 품 안에 와락 안겨오는 자그마한 온기와 들려오는 옹알이로 수마에서 겨우 벗어나면 눈 앞 바로 보이는 자그마한 얼굴. 방긋 웃는 얼굴이, 꼭 접힌 눈가가 어쩐지 누구를 떠올리게 해서 더욱이 사랑스러웠다. 예뻐라, 품에 꼭 안고 뺨과 뺨을 맞대고 부비다 턱으로 장난스레 꾹 누르면 이잉, 하고 작게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다. "시..

"야, 송민호. 너는 쟤가 뭐가 좋냐."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알면 포기할 텐데. 민호는 턱을 괸 채, 앞에 앉은 진우의 어깨너머 보이는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단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헝클어진 머리는 내려쬐는 햇볕보다 더 밝은 빛으로 물들어 선풍기 바람을 타고 느리게 엇갈렸다. 넥타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셔츠 단추는 잠근 것보다 채워진 걸 세는 게 더 빨랐다. 그나마 흰 티라도 받쳐 입어서 다행이지, 민호는 작게 혀를 찼다. 진짜, 궁금하네. 내가 강승윤을 왜 좋아하는 거지. * 송민호는 반장, 미술 특기생에다가 나름대로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는 모범생이었다면 강승윤은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일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선생님들의 주시를 받는 관심학생이었다. 그러니까 굳..

1. 소원종이 소원을 이뤄준대, 그 말에 코웃음을 쳤었다. 유치하게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냐고 비웃었다. 그래, 한 치 앞날도 모르고 말이다. 송민호, 올해로 28살이 되는 찌들 대로 찌든 직장인은 허무맹랑한 말이라며 그렇게 비웃어놓고서는 제야의 종이 울리자마자 이러고 있다. 진짜 소원을 이뤄주냐, 너. 손에 들린 자그마한 풍등에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풍등 아래 달린 작은 종이에는 무어라 까만 글씨가 적혀 있었지만 너무 작아서 안 보일 지경이었다. 마치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 "이 나이 먹고 뭐하는 짓이냐." 그래도, 믿어봐도 손해는 아니겠지. 그렇겠지. 밤바다의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고민 끝에 풍등 안에 있는 초에 불을 붙인다. 두둥실, 붉은 풍등이 떠올라 민호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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