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의 공간
[솜강/단편] 별님, 소원을 들어주세요. 본문
<썰 빙고> 1. 소원종이
소원을 이뤄준대, 그 말에 코웃음을 쳤었다. 유치하게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냐고 비웃었다. 그래, 한 치 앞날도 모르고 말이다. 송민호, 올해로 28살이 되는 찌들 대로 찌든 직장인은 허무맹랑한 말이라며 그렇게 비웃어놓고서는 제야의 종이 울리자마자 이러고 있다. 진짜 소원을 이뤄주냐, 너. 손에 들린 자그마한 풍등에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풍등 아래 달린 작은 종이에는 무어라 까만 글씨가 적혀 있었지만 너무 작아서 안 보일 지경이었다. 마치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
"이 나이 먹고 뭐하는 짓이냐."
그래도, 믿어봐도 손해는 아니겠지. 그렇겠지. 밤바다의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고민 끝에 풍등 안에 있는 초에 불을 붙인다. 두둥실, 붉은 풍등이 떠올라 민호의 손을 떠나간다. 높이, 높이. 까만 밤하늘을 물들인 별들 곁에 다다를 때까지 그렇게 떠올라서 별에게 전해줬으면.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
첫사랑, 달다면 달고 쓰다면 쓴 그것.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추억만을,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만을 남기고 떠났을 어떤 의미로든 난생처음 느껴보는 충격적인 감각. 송민호에게 첫사랑은 전자이자 후자였다. 그래서 19살에 시작했던 것을 28살이 되도록 놓지 못하고 여전히 붙잡고 가고 있었다. 이름 석 자, 생일, 그 앳되던 얼굴 하나 잊지 않고 고스란히 마음에 품은 지가 9년 째란 말이다. 심지어 그 사이에 단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없는데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 채 그렇게 억지로 붙잡고 가고 있었다.
"이제 연애 좀 해라, 제발. 구질구질하게 뭐하냐, 멀쩡하게 생긴 놈이."
"그런 말 하려고 불러낸거면 갈게요, 형."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로 다시 목도리를 둘러매는 모습에 승훈은 혀를 차며 민호의 목도리를 앗아낸다. 승훈이 민호의 짝사랑 한탄을 들어준 지도 9년, 이제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저 좋다는 사람이 한 트럭인데도 가물한 그 첫사랑 못 잊어서 저러는 꼴이 안타깝기도 했다. 저 잘 돼라고 하는 말인데 까칠하긴, 승훈은 혀를 차고는 민호를 억지로 앉혔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찾아보기라도 하던가."
"걔는 나 안 보고 싶을 걸요."
"물어봤냐? 물어봤어? 그냥 네 생각이잖아."
걔가 날 찼는데 보고 싶겠냐고요, 민호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승훈이 채워준 잔을 비워낸다. 찾아볼 생각도 않고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그려댔다. 흐릿해질 만하면 19살의 네가 꿈에 나타나 다시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짙어졌다. 잊지도 못하게, 그렇게 9년을 꼬박 잊지도 못하게 첫사랑은 민호에게 나타났다.
"맞다, 너 그거 해봤냐?"
"뭐요."
"새해 첫 날, 제야의 종 끝나자마자 풍등 날리는 거."
잔을 쥔 민호의 손끝이 움찔 떨린다. 그것을 놓칠 승훈이 아니었다. 이것 봐라, 유치하다고 웃더니. 빨리 이실직고하라는 듯, 승훈의 발끝이 민호의 정강이를 툭툭 두드린다. 아, 아파요. 애꿎은 엄살만 피던 민호가 붉어진 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입을 겨우 연다. 했어요, 뭐. 할 수도 있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잔뜩 변명하는 투라 승훈이 자지러지게 웃는다. 으하학, 웃는 소리가 파티션을 너머 퍼지는데도 그렇게 한참을 웃었더랬다. 그만 좀 웃어요, 민호의 발끝이 승훈의 정강이를 강타하고 나서야 겨우 웃음이 잦아들었다.
"유치하다며, 임마."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인가 싶더라고요. 보고 싶은데, 뭐."
"그 유치한 짓해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면 100번도 더 할 수 있어요."
붉어진 귀와 달아오른 뺨은 쉬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민호는 애써 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휴, 미련곰탱이. 나 같으면 흥신소 같은 데다 의뢰라도 했을 텐데. 승훈이 턱을 괸 채로 민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혹여나 그것마저 그 사람이 싫어할까 봐 못 하겠다는 저 순해빠진 놈을 어쩌면 좋을까.
"보고 싶다, "
"강승윤."
테이블 위에 뺨을 대고 한숨을 푹 쉬는 민호를 바라보던 승훈이 가볍게 민호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만하면 한 번쯤 만날 때 안 됐겠냐, 우리나라가 얼마나 좁은데. 그 말에 민호가 한숨을 푹 쉬면 장난기 어린 승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별님도, 풉, 네 지극정성을 알면 소원을 들어주겠지. 으하학."
놀리지 마요, 김 빠지는 목소리가 민호의 입가를 타고 흐른다. 투명한 맥주 잔 너머로 기포가 뽀글뽀글 떠오른다. 마치 엊그제 날린 풍등처럼 위로, 또 위로. 터져버리는 기포에 결국 눈을 꾹 감는다. 터져버린 기포처럼 결국 이뤄지지 않을 소원이겠지, 그건.
다시 한번만 더 너를 만나게 해 달라는 바람은 흩어질 말이겠지.
*
휘청, 가로등이 일렁인다. 아파트 입구에 기대어 한숨을 푹 쉰다. 택시를 타고 어찌 집을 찾아오긴 했네. 졸려오는 눈가를 손등으로 비빈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눕고 싶은데, 술에 푹 절여진 몸은 주인의 마음도 모르고 늘어지기만 한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겨우 정신이 들 때쯤이면, 맞은편 아파트 위에 걸려있던 달이 어느새 제 머리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 그 위로 겹쳐지는 어린 얼굴, 이 정도면 병 아니야. 고개를 몇 번 젓고 나서야 민호의 발이 떨어진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꾹 누르고 마냥 기다린다. 작게 하품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닫힘 버튼을 꾹 누른다.
"잠시만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닫힘 버튼을 누르던 손가락을 옮겨 열림 버튼을 누른다. 감사합니다,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끄덕인다. 9층, 버튼을 꾹 누르려 손을 뻗으니 제 손가락 위에 방금 들어선 남자의 손가락이 겹쳐진다. 어, 하는 짧은 탄성이 흘렀다 사라진다. 옆집에 살면서 민호에게 살뜰히 반찬을 나눠주던 아주머니가 이사 간 지 한 달, 오늘 드디어 누가 이사 왔나 보구나.
작게 하품을 몇 번 더 하니 엘리베이터가 멈춰 선다. 가물거리는 눈가를 꾹꾹 누르면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낸다. 오늘따라 잘 들어가지도 않네. 한숨을 푹 쉬다 결국 열쇠를 떨군다. 민호가 주저앉기 전에 먼저 그 열쇠를 주워내는 끝은 붉게 물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어쩐지 낯이 익다. 기분 탓이겠지.
"ㄱ, 감사합니다."
열쇠를 받아내며 고개를 들면 꿈같은 그 얼굴이, 아까 달 위로 겹쳐지던 그 어린 얼굴이 있다. 그때보다는 조금 성숙해진, 젖살도 빠졌지만 그래도 알아볼 수 있는 그 얼굴. 매일 밤, 꿈 속에 나오던 그 얼굴이 있다. 열쇠를 받으려 내밀었던 손이 굳는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흐릿한 시야에 애써 힘을 준다. 그리던 얼굴이 있는데, 어쩐지 계속 흐려진다.
"송민호?"
"윤아? 승윤, 맞아?"
꼬이는 발음에 민호는 애써 주먹을 움켜쥔다. 올라오는 술기운을 애써 삼켜내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며 그렇게 눈 앞에 선 애타던 그 얼굴을 바라본다.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것을 팔로 벅벅 닦아낸다. 거짓말인가, 이거. 혹시 꿈은 아닐까. 열쇠를 건네는 손이 뜨거워서,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열쇠가 낯설어서 입술을 꾹 물어낸다.
"오랜만이다."
"…ㄱ, 그러게."
그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어려워서 몇 번을 더듬는다. 그런 민호를 말없이 승윤은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길에 민호는 애써 울음을 삼킨다. 아무런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다 뒤도는 승윤의 옷자락을 민호는 저도 모르게 잡아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차마 떨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바라보면, 승윤이 옅게 웃는다.
"내일,"
"이야기할까."
"너 술 깨고 나면."
그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응, 알았어. 뭉개진 발음으로 답을 하고는 열쇠를 푹 꽂는다. 안녕, 차가운 바람에 옅게 흩어지는 인사. 꿈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열쇠. 꾹 움켜쥐었다 놓는다. 내일 그리던 너를 다시 만난다. 졸려오는 몸에 침대 위에 엎어지면 그 옆으로 난 창가, 그 너머로 옅은 빛이 반짝인다.
까맣게 물든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천천히 빛을 낸다.
'끄적거림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솜강/단편] 어느 평범한 휴일 (0) | 2019.08.24 |
---|---|
[솜강/단편] 네가 좋은 이유 (for. 한량 님) (0) | 2019.08.19 |
[솜강/단편] 위순(委順) (for. 흔적 님) (0) | 2019.05.28 |
[솜강/단편] 추락(墜落) (for. 흔적님) (0) | 2019.05.15 |
[솜강/단편] 가장 친한 친구 (0) | 2019.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