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의 공간
[솜강/단편] 네가 좋은 이유 (for. 한량 님) 본문
"야, 송민호. 너는 쟤가 뭐가 좋냐."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알면 포기할 텐데. 민호는 턱을 괸 채, 앞에 앉은 진우의 어깨너머 보이는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단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헝클어진 머리는 내려쬐는 햇볕보다 더 밝은 빛으로 물들어 선풍기 바람을 타고 느리게 엇갈렸다. 넥타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셔츠 단추는 잠근 것보다 채워진 걸 세는 게 더 빨랐다. 그나마 흰 티라도 받쳐 입어서 다행이지, 민호는 작게 혀를 찼다.
진짜, 궁금하네.
내가 강승윤을 왜 좋아하는 거지.
*
송민호는 반장, 미술 특기생에다가 나름대로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는 모범생이었다면 강승윤은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일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선생님들의 주시를 받는 관심학생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둘은 상극까지는 아니더라도 찾을 수 있는 맞는 점이 성별과 나이 말고는 없었다. 혹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닮기도 했다. 만날 접점이라고는 조금도, 민호의 운동실력만큼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삶을 방관하며 나란히 이어질 평행선이었는데 그 선을 억지로 꺾어 점 하나를 콕 찍어 접점을 만들고 싶어 하는 쪽은 민호였다. 어쩌다였는지 본인도 모른 채, 어느 순간부터 승윤을 그렇게 눈으로 좇고 있었더랬다.
"내가 쟤를 왜 좋아할까."
"나도 궁금하다, 진짜."
민호는 입에 아이스크림 막대를 잘근 씹으며, 흘끗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이유, 송민호가 강승윤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냥, 강승윤이라서. 그런 추상적이고 아리송한 답이 아니라 명확한 해답을 원했다. 그렇게 아주 단순한 이유로 며칠 동안이나 송민호의 강승윤 관찰기가 시작되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하루에 몇십 번이고 승윤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나름 이유를 붙여서 더 보겠다는 귀여운 잔머리였다.
입술, 저 몰랑해보이는 통통한 입술 때문이 아닐까. 민호는 버릇처럼 승윤을 크로키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덧칠하며 그리던 자신의 모습에 무릎을 탁 쳤다. 바르는 거라고는 니베아 립크림 밖에 없으면서 발갛게 잘 익은 사과처럼 불그스름하면서도 남다른 두께를 자랑하는 그 입술, 역시 그거네. 답은 입술밖에 없지. 도톰해서 푹 누르면 들어갔다가도 금방 다시 통통해질 것 같은 폭신한 입술이 답이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툭 튀어나온 부리 같은 입술. 귀엽다. 저게 답이 아닐 리가 없지.
"야, 김진우."
"왜."
"강승윤 입술 존나 예쁘지 않냐."
"미친놈아, 좀 닥쳐."
질색하는 진우의 눈길을 모른 채 입을 헤, 하고 벌린 채 승윤의 입술을 눈으로 좇는다. 저거네, 저거. 암만 봐도 저거야. 오전 내내 입술이 답이라 단정 짓던 민호의 생각은 5교시 체육 시간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
점심을 먹고, 체육 시간을 위해 다들 체육복으로 갈아입느라 분주했다. 어떻게 빨아도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냐,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단체로 야유하는 것도 잠시였다. 조금이라도 운동장에서 더 뛰어보겠다고 한창 혈기왕성한 열여덟 살들은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앞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문단속을 해야 하는 반장 송민호와 점심을 먹고 와서 자리에 엎드린 이후 조금의 미동도 없는 강승윤뿐이었다. 이제 슬슬 나가야 하는데, 민호는 시계를 바라보다 승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강승윤."
"… 누구야."
"나 반장인데, 이제 체육이거든? 너 옷 갈아입고 나가야 될 거 같은데."
"아, 나 체육복 없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고민하다 자신의 체육복을 꺼냈다. 다행이다, 어제 섬유유연제 팍팍 넣고 빨아서. 내민 체육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승윤의 시선이 민호의 눈과 마주했다. 말간 눈이 어쩐지 어여쁘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 얘는 입술도 예쁜데 눈도 예쁘네. 쌍꺼풀도 없이 크고 약간 위로 찢어진 눈, 참 예쁘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승윤의 품에 옷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냥 얼굴인가 봐, 나 쟤 얼굴에 반했나 봐.
"난 반팔에 긴 바지 입고 나갈 테니까, 넌 긴 팔에 반바지 입고 나가."
"고마워."
옅게 띈 미소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산스레 자리로 돌아갔다. 애써 바쁜 척, 고개를 푹 숙이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참고서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귀가, 달아오른 뺨이 들킬까 봐 더욱 고개를 숙인다. 눈도 예쁘고 웃는 얼굴도 예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라 천하의 송민호도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쟤는 뭐 저렇게 예쁘냐. 속으로 한숨을 삼키다 고개를 들면, 그곳에 체육복 반바지를 입은 승윤이 있다.
"먼저 나갈게."
"…어, 어. 먼저 나가."
승윤이 문이 닫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민호는 그대로 바닥 위로 주저앉았다. 와, 씨.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애써 문지르며 감았던 눈을 뜨면 아직도 승윤의 길고 곧게 뻗은 다리가 눈에 선하다. 평소에도 길고 쭉 뻗은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리는 예상보다 더 예뻤다. 타지도 않은 새하얀 피부가, 모난 곳도 없이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품이 넉넉한 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생각보다 더 위험했다. 낭랑 18세, 이 혈기가 넘치는 청소년에게는 너무 유해하게만 느껴졌다. 아니, 저래도 되는 거야? 반바지라니 미친 거 아냐. 불과 13분 전, 자기가 빌려준 것은 새까맣게 잊고서 애꿎은 승윤 탓을, 아니 승윤의 다리 탓을 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게 마음에 들어서, 너의 겉모습에 반한 걸까.
*
그렇게 며칠을 관찰을 했더랬다. 금사빠라서, 승윤의 외면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나 보다 하고 납득하려는 그 맘 때쯤. 그날도 크로키를 슥슥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랬다. 저기, 하고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면 보이는 강아지를 닮기도, 병아리를 닮기도, 고양이도 닮기도 한 얼굴.
"반장."
"어, 왜?"
"체육복 고마웠어."
툭, 종이가방을 하나 내민다. 아, 맞다. 얘가 빌려갔었지,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가방을 받으니 옅게 웃는다. 덕분에 안 혼났어, 민망한 듯 뒷목을 긁으며 중얼거리고는 금세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귀엽다, 진짜.
"침 흐른다, 송민호."
"누가 침을 흘려."
벌어진 입술을 꾹 다물고 웃고는 종이가방을 열어보면 새로 빨았는지 낯선 섬유유연제 향이 코끝을 타고 올라온다. 얘는 향도 왜 이렇게 달짝지근한 걸 쓴대, 나오려던 말을 속으로 삼키고는 가방에 손을 넣으니 바스락 거리는 것이 닿는다. 꺼내보니 손글씨로 고맙다고 적힌 쪽지 하나, 조그마한 사탕 몇 개, 그리고 초콜릿 하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사탕을 하나 톡 까서 입에 넣으면 상큼한 레몬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멍하니 입 안에서 사탕을 녹여낸다. 네 머리카락을 닮은 노란빛, 달디 단 향이 사르륵 녹는다.
그제야 알았다. 송민호가 강승윤을 좋아하는 명확한 이유는,
그냥 강승윤이기 때문이라고.
강승윤이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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